왜 카이스트는 입시에 "인생 책 3권"을 묻는가

최근 학생들에게도 익숙한 영화 장르 가운데 '타임루프물'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같은 시간을 반복해서 살아가며 자신이 했던 실수를 고치고, 다른 선택을 시도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장르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히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이 흥미롭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에는 시간을 되돌리는 버튼이 없습니다. 이미 내린 결정은 취소할 수 없고, 선택하기 전에 그 결과를 미리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에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독서입니다. 책은 다른 사람의 삶을 미리 경험하게 해주는, 가장 안전한 형태의 타임머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직접 살아볼 수 있는 인생은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책을 펼치면 전혀 다른 시대와 환경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생각과 선택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원했는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어떤 판단을 내렸고 그 선택이 결국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 실패하지 않고도 누군가의 실패를 먼저 경험하는 셈입니다.
고전문학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수백 년 전의 이야기라도 인간의 욕망과 선택은 놀라울 만큼 지금과 닮아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은 사랑과 질투, 권력과 욕망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위대한 개츠비』는 성공과 부에 대한 욕망이 인간관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레 미제라블』은 법과 정의, 용서라는 문제를 마주하게 합니다. 조금 더 가까운 예로,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작은 거짓말을 했다가 그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소중한 관계를 무너뜨리는 이야기를 떠올려보아도 좋습니다. 독자는 그 인물이 거짓말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불안을 함께 느끼고, 관계가 무너지는 결말을 지켜보며 그 무게를 미리 체감합니다. 훗날 비슷한 유혹의 순간을 실제로 마주하게 된다면, 이미 그 결말을 한 번 '살아본' 사람이 같은 실수를 반복할 확률은 훨씬 낮아집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이야기 속 선택을 정답과 오답으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다른 선택은 가능했을까?"를 스스로 물어보는 과정입니다. 이 질문의 습관은 현실의 의사결정에서도 그대로 작동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선택한다는 이유로 진로를 정하거나, 눈앞의 높은 연봉만 보고 직업을 고르거나, 당장의 성적을 위해 자신에게 맞지 않는 길을 무리하게 따라가는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실제 인생에서는 그 결과를 수년 뒤에야 알게 되지만, 다양한 이야기를 미리 읽은 사람은 비슷한 상황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를 한발 앞서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독서 경험의 가치는 대학 입시에서도 확인됩니다. 카이스트(KAIST)는 학부 입학전형에서 지원자의 독서 경험을 제출받는 대표적인 대학입니다. 창의도전전형은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 3권 이내를, 일반전형은 5권을 목록으로 제출하게 하며, 몇 권을 읽었는지보다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장치로 활용합니다. 세계적인 과학기술 인재를 길러내는 학교조차 그 사람의 그릇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무엇을 읽어왔는가'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독서가 사고력과 인성의 근간이라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녀의 독서를 바라보는 기준도 조금 달라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달에 몇 권 읽었니?"보다 "그 책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인물은 누구였니?", "그 사람의 선택에 동의하니?",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니?"라고 물어보는 것이 훨씬 의미 있는 대화가 됩니다.
타임루프 영화에서는 주인공에게 과거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지지만, 현실에는 그런 기회가 없습니다. 대신 우리에게는 수천 년 동안 쌓여온 인간의 경험이 있습니다. 내가 직접 실수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실수를 읽어보고, 내가 후회하기 전에 누군가의 후회를 미리 경험해보는 것. 그래서 책은 단순한 종이와 활자의 묶음이 아니라,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안전한 타임머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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